- 박종화(朴鍾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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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81
- 시인, 소설가로 호는 월탄. 서울 출생. 1921년에 시 동인지 <장미촌>에 시 <오뇌의 청춘>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 후 1936년에 장편 소설 <금삼의 피>를 <매일신보>에 연재하면서부터 특히 역사 소설을 주로 써서 큰 인기를 끌며 문단의 지도자로서 큰 활약을 했다.
[대표작] 시<밀실로 돌아가라> <사의 예찬> 소설<대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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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원(朴趾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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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1805
- 조선 후기의 실학자, 소설가로 호는 연암. 서울 출생. 일찍이 중국(청나라) 베이징을 왕래하며 견문을 넓힌 그는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학문 탐구를 주장하여 실학자로서 지위를 굳히고 1780(정조 4)에는 베이징에 다녀와서 유명한 기행문 <열하일기>를 펴내었다. 한편 독특한 해학과 사실적인 문체로써 한문 소설에 발표, 조선 시대 한문 문학의 대표자로 꼽힌다.
[대표작] 소설<허생 전> <양반전>
[저서] <과농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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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화성(朴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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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88
- 여류 소설가로 호는 소영. 전남 목포 출생. 1925년에 <추석 전야>를 <조선문단>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으나 한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 1931년에 장편 소설 <벽화>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다시 문단에 나섰다. 이 후 작품을 계속 발표하는 한편, 여류 문인 협회 회장, 예술원 회원 등을 지내었다.
[대표작] <고개를 넘으면> <타오르는 밤> <벼랑에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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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정환(方定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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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1931
- 동 문학가, 사회 사업가로 호는 소파. 서울 출생. 일본 도쿄 대학 시절에 아동 문학 및 어린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그 선구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1923년에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이어 윤극영, 마해송, 윤석중 등과 더불어 아동 문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였으며, ‘어린이날’을 정하였다. 그의 ‘어린이 사랑’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57년에 ‘소파상’이 제정되었다.
[대표작] <동생을 찾아서> <7.7단의 비밀> <까치옷>
[저서] 동화집<사랑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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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철(白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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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985
- 문학 평론가로 본래 이름은 세철. 평북 의주 출생. 일본 도쿄 고등 사범 학교 졸업 후 귀국, 이 후에는 동국 대학교, 서울 대학교 문리대, 중앙 대학교 등의 교수로 있으면서 활발한 문학 평론 활동을 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에 최초로 미국의 분석 비평을 도입하였으며 서양 문학의 소개 및 문학의 세계성 과 민족성 등을 다룬 많은 평론을 발표하였다.
[저서] <국문학 전사> <신문학 사조사> <문학 개론> <진리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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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로(卞榮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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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961
- 시인, 수필가로 호는 수주. 서울 출생. 3.1 운동 때 ‘독립 선언서’를 영어로 번역, 외국으로 보낸 일이 있는 그는 1922년 이후 <개벽>지를 통해 해학이 넘치는 수필과 외국 작품을 번역하여 발표하였다. 1924년에 펴낸 그의 첫 시집 <조선의 마음>에는 격조 높은 시 정신과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이 깔려 있다.
[대표작] 시<봄비> <논개>
[저서] 시집<수주 시문선> 수필집<명정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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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명응(徐命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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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6~1787
- 조선 시대의 학자, 문신으로 호는 보만재. 1755년에 서장관으로서 청나라에 갔다 온 후 동부승지, 대사헌, 이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예조참판, 충청도 수군절도사, 한성부판윤, 홍문관대제학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수어사.봉조하 가 되었다. 역학에 밝은 실학의 대가인 그는 1759(영조 35)에 세종, 세조 때 사용하던 악보를 수집하여 <대락전보> <대악후보>를 펴내었다.
[저서] <보만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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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구(徐有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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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1845
- 조선 시대의 문신, 농정가, 실학자로 호는 풍석. 1834년에 호남 순찰사로서 궁핍한 백성들을 보자 안타까이 여겨, 일본에 가는 통신사에게 부탁, 고구마 종자를 가져 오게 하여 이를 각 고을에서 재배토록 하였다. 그리고 <종저보>를 지어 그 재배법을 널리 퍼뜨렸으며, <농대> <경계책> 등을 써서 영농법의 개량을 왕에게 아뢰었다. 그 후 <임원경제십육지>를 썼는데, 이것은 주로 농업 경제에 관한 백과 사전식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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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주(徐廷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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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2000
- 탁월한 언어 감각과 전통 소재의 활발한 활용으로 대한민국 문학계(특히 현대시)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이라고 불리는 인물로 평가받지만 친일, 친독재 행위와 반인륜 범죄에 대한 미화 때문에 기회주의적 어용 문인의 행태를 보였다는 비판과 반인륜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친일 전력이 있는 문학가의 글은 교과서나 참고서에 되도록 싣지 않으나, 그의 글은 정말 잘 썼고 중요성이 높다 보니 여전히 때때로 실리며 모의고사에도 출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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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삼문(成三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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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1456
-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로 호는 매죽헌.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그는 한글 창제 때에 명나라의 학자 황찬을 13번이나 찾아가 음운을 물었다고 하며, 다시 명나라에 가서 음운 등을 연구,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후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등과 더불어 단종을 다시 왕으로 받들려다가 실패, 세조(수양대군)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저서] <성근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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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世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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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9~1450 / 재위 1418~1450
- 조선의 제4대 왕으로 태종의 셋째아들. 22세 때 왕의 자리에 오른 그는 정치, 외교,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큰 업적을 쌓아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1420년에 집현전을 마련하고, 1446년에는 훈민정음을 반포하였으며 1449년에는 스스로 <월인천강지곡>을 지은 후 정인지, 권제, 안지 등으로 하여금 <용비어천가>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친히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만들고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 등 각종 천문, 과학 기구를 제작케 하였다. 한편 박연에게 명하여 음악을 정리하게 함으로써 아악의 기초를 닦고, 또 악보도 만들게 하였다. 또한 6진을 개척하고 4군을 설치하였으며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으마, 후에 3포(제물포, 부산포, 염포)를 열어 무역의 길을 터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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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열(宋時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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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1689
-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로 호는 우암. 봉림 대군(효종)의 스승이던 그는 벼슬이 좌의정, 우의정에 이르렀으나 서인의 우두머리로서 치열한 당파 싸움에 시달리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청주 화양동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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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경왕후(獻敬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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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5~1815
- 조선 시대 때 장헌(사도)세자의 아내로, 정조의 어머니. 1762년에 장헌 세자가 그 아버지인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혜경’에다 ‘궁’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므로 ‘혜경궁 홍씨’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9년(광무3)에 장헌 세자가 정조로 다시 왕위에 올려지자 경의 왕후로 올랐다. 남편인 사도(장헌)세자가 참변을 당한 일을 돌이켜 생각하여 지은 소설 형식의 <한중록>은 우리 나라 궁중 문학의 으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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