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소천(姜小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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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63
- 아동 문학가로, 본래 이름은 용률, 함남 고원 출생. 함흥 영생 고등 보통 학교 졸업 후 교편 생활을 하다가 월남,<새벗>,<아동 문학>등의 편집 일을 하였으며, 아동 문학 연구회 회장 등을 지내었다. 1930년 이후부터 동시.동요를 쓰기 시작, <조선일보>신춘문예에<민들레와 울아기>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아동 문학가인 그는 크리스트교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한 교훈적인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대표작] <닭> <호박꽃 초롱> <꿈을 찍는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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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용묵(桂鎔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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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61
- 소설가로, 평북 선천군 출생. 1928년에 일본 도요 대학 동양학과에서 공부하였으며, 1927년에 소설<최서방>이 <조선일보>에 발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 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잡지<대조>를 창간하고, 1.4후퇴 때에는 제주도로 피난하여 월간 잡지 <신문화>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대표작] <백치 아다다> <별을 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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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경명(高敬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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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3~1592
-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호는 제봉.태헌.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호조좌랑 등의 벼슬을 지내고, 1581년(선조14)에 사신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591 년에 동래 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당쟁 때문에 그 자리를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이 59세인데도 무릅쓰고 광주에서 의병7천여 명을 지휘하여 금산에 쳐들어온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한편, 시문.글씨.그림에도 뛰어났다.
[저서] <제봉집> <우서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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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우(郭再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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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2~1617
- 조선시대의 의병자으로, 호는 망우당.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의(붉은 옷)을 입고 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 장군’ 이라고 불리었다. 1597년의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산성(창녕군)을 끝까지 지키었고, 후에는 벼슬길에서 떠나 창암에서 조용히 지냈다. 한편, 시문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저서] <망우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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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상(具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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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2004
- 시인으로, 본래 이름은 상준. 함남 원산 출생. 원산에서 <음양>이라는 시 동인지를 통해 활약하다가 월남하여 <승리일보> <영남일보> <경향신문> 등에서 편집 일을 하였다. 한국 문학상과 서울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저서] 시집<초토의 시> <구상 시집>, 평론집<민주 고발> <부언 부어>,
편저<예술과 인생의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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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근(權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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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2~1409
-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로, 호는 양촌. 정도전,정몽주 등과 더불어 친명 정책을 내세웠으며, 사병의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의 확립에도 공헌하였다.
그는 대제학 때에 왕의 명으로<동국사략>을 펴내었으며, 그가 지은 <입학도설>은 우리 나라 최초로 그림을 넣어 학문을 설명한 책으로 유명하다. 한편, 문장에 뛰어나고, 성리학에도 밝았다.
[대표작] <상대별곡>
[저서] <양촌집> <오경천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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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섭(金珖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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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77
- 시인으로, 호는 이산. 함북 경성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 중동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38년에는 제1시집<동경>을 발표하고, 8.15 광복 후에는 민주주의와 민족 문학의 건설을 위해 문화계, 언론계 등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조국애, 민족애를 밑바탕에 깐 생명의 참모습을 표현하였다.
[저서] 시집<마음> <해바라기> <성북동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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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주(金光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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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73
- 소설가로, 경기도 수원 출생. 1933년에 상하이로 가서 중국 문학을 우리 나라에 소개하는 한편, <밤이 깊어 갈 때>등의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8.15광복 후 귀국하여 <문화 시보> <조선 예술>의 창간에 앞장서며 활발한 문예 활동을 하였다.
[대표작] 소설<결혼 도박> <혼혈아> <장미의 침실> 수필집<춘우송>
[저서] 소설집<석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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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金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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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1949
- 독립운동가, 정치가로 호는 배범. 황해도 해주 출생. 일찍이 동학에 입교, 접주가 된 그는 1894년에 동학 운동이 일어나자 해주 동학군의 앞장에 서서 활약하였고, 3.1운동 후에는 상하이로 망명,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의 항일 의거를 지도했다. 1944년에 임시 정부의 주석이 된 그는 8.15광복을 맞아 귀국, 반탁 운동을 했으며, 1948년에는 남한만의 총선거에 반대, 남북 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가서 회담했으나 실패했다. 이 후 이승만 과 맞서다가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저서] <백범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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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수(金綺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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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
- 조선 고종 때의 문신으로 호는 창산. 1876년(고종 13)에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수신사로서 75명의 사절을 이끌고 일본을 다녀옴으로써 근세 한.일 외교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 때 보고들은 것을 기록한 <일동기유> <수신사 일기>는 훗날 신사 유람단을 파견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한편, 명필로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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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조(金南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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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 여류 시인으로 대구 출생. 1951년에 처녀 시집<목숨>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한 이래,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 시인으로서 활약 하였다. 1958년에 자유 문학가 협회상, 1963년에 5월 문학상을 받았다.
[저서] 시집<나아드의 향유> <나무와 바람> 수상집<잠시, 그리고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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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내성(金來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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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957
- 소설가로 호는 아인. 평남 대동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탐정 소설 <백가면> <살인 예술가> <마인> 등을 계속 발표함으로써 우리 나라 유일의 탐정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러나 1949년 무렵부터는 대중 소설에 손을 대어, 치밀한 구성력과 통속적인 흥미를 조화시켜 큰 인기를 끌었다.
[대표작] <청춘 극장> <인생 화보> <실락원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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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리(金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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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1995
- 시인, 소설가로 본래 이름은 시종, 어릴 때 이름은 창봉. 경북 경주 출생. 경신 중학을 중퇴한 후 1934년에 시 <백로>가 <조선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됨 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 후 서정주 등과 더불어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활약하였고, 8.15광복 직후의 좌.우익의 투쟁과 6.25남침을 통하여 민족 문단을 지키고 육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는 순수 문학과 신인간주의 의 문학 사상을 꾸준히 지켜 온 작가이다.
[대표작] 소설<사반의 십자가> <무녀도> <황토기> <실존무> <등신불>
[저서] 평론집<문학과 인간> 수필집<자연과 인생>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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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명(金東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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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68
- 시인, 정치 평론가로 호는 초허. 강원도 명주 출생. 흥남, 강서 등지에서 교사로 있다가, 1923년에 시<당신이 만약 나에게 문을 열어 주시면>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 후 일본으로 가서 아오야마 학원 신학과를 졸업하고 귀국, 첫 시집<나의 거문고>를 발표하였다. 월남 후에는 차츰 서정성에서 벗어나 정치, 사회에 관심을 보여 정치 평론을 주로 썼다.
[저서] 시집<파초> <삼팔선> <진주만> 수필집<세대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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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삼(金東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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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1937
- 독립운동가. 1909년에 비밀 청년 단체인 ‘대동 청년단’을 만들고, 1918년에는 김좌진 등과 39명의 연서를 받아 최초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후에는 한족회를 조직하고 <한족신보>를 발행하였으며, 1931년 만주 사변 때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8 년 동안을 감옥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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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인(金東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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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51
- 소설가로 호는 금동, 춘사. 평양 출생. 일본 도쿄 메이지 학원 중학부 및 가와바타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후, 우리 나라 최초의 문학 동인지인 <창조> 를 1919에 펴내고, 거기에 첫 단편 소설<약한자의 슬픔>을 발표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사실주의 문학의 길을 열었다. 우리 나라에 본격적인 단편 소설 형식을 개척한 그는 간결하고도 현대적인 문체로써 문장의 혁신에 이바지했고,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워 순수 문학 운동을 폈다.
[대표작] 소설<배따라기> <발가락이 닮았다> <광화사> <광염 소나타> <젊은 그들> <붉은 산> <운현궁의 봄> 평론<조선 근대 소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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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환(金東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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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
- 시인으로 호는 파인. 함북 경성 출생. 1924년에 첫 시집<국경의 밤>을 펴내었는데, 이 시는 우리 나라 최초의 서사시 형식을 선보인 작품이다. 그는 6.25 남침 때 북으로 끌려갔다.
[대표작] <승천하는 청춘> <북청 물장수> <산 너머 남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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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립(金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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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1863
- 조선 시대의 방랑 시인으로 본래 이름은 병연, 호는 난고. 경기도 양주 출생.
그의 할아버지인 선천 부사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자 일찍이 산에 들어가 공부하며 성장, 20세 무렵부터 삿갓을 쓰고 방랑 생활을 하며 즉흥시를 지어 울분을 달래었으므로, 그를 흔히 ‘김삿갓’으로 일컫는다.
그는 특히 권력자와 부자들의 횡포를 풍자한 많은 시를 읊음으로써 우리 나라 최고의 민중 시인으로서 널리 사랑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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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기(金萬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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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3~1687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서석. 송시열의 제자인 그는 1671년(현종 12)에 그의 딸이 세자빈이 되고, 1674년에 숙종이 왕의 자리에 오르자 숙종의 장인 으로서 광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이 후 김수항의 추천으로 벼슬이 대제학에 이르렀다.
[저서] <서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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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중(金萬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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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1692
-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소설가로 호는 서포. 일찍이 당파 싸움에 휩쓸려 예조참의 대사헌 등의 벼슬길에서 떠나 여러 번 유배 생활을 한 그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여, 유교,불교, 선교의 세 가지 인생관이 잘 드러나 있는 국문 소설<구운몽>을 지어 어머니를 즐겁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현왕후를 폐출한 숙종을 참회시키기 위하여 소설 <사씨남정기>를 귀양살이를 하던 남해도에서 지었다.
[작품] <서포만필> <서포집> <고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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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말봉(金末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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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61
- 여류 소설가로 부산 출생. 1935년에 <밀림>, 이듬해에 <찔레꽃>이 각각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연재됨으로써 이름을 날리었다. 이후 많은 대중 소설을 발표, 인기를 끌었다.
[대표작] 장편소설<화려한 지옥> <푸른 날개> <성좌는 부른다> <옥합을 열고> 단편 소설<이슬에 젖어> <바퀴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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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용(金尙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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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1951
- 시인으로 호는 월파. 경기도 연천 출생. 일본 릿쿄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이화 여전 교수를 지내었다. 1930년 무렵부터 시 쓰기를 시작, 계속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포.키츠.램 등의 작품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에는 우수와 체념이 깃든 관조적인 서정의 세계가 깔려 있다.
[대표작] 시<남으로 창을 내겠소> <서글픈 꿈> <노래 잃은 뻐꾹새> <산에 묻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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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월(金素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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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1934
- 시인으로 본래 이름은 정식, 소월은 호. 평북 구성군 출생. 오산학교 중학부 , 배재 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 상대를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 학교 시절에 민요 시인 김억의 지도를 받으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민요적인 가락으로 노래함으로써 한국 신시사상 최고의 서정 시인으로 평가된다. 한 때 사업에 손을 대었으나 실패하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산유화> <못 잊어>
<예정엔 미처 몰랐어요> <초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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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습(金時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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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1493
- 조선 시대의 학자로 호는 매월당. 생육신의 한 사람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가이기도 한 그는 승려가 되어 전국을 떠돌았으며, 여러 번 세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그는 이후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살면서 한문 소설<금오신화>를 지었는데 이 작품은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로서 그 가치가 크다.
[저서] <매월당집> <십현담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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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랑(金永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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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1950
- 시인으로 본래 이름은 윤식. 전남 강진 출생.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에서 공부한 후 귀국하여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민족주의 편에 서서 활약하였으며, 6.25 전쟁 때 서울에서 포탄이 파편을 맞고 숨졌다.
그는 언어의 율조 및 잘 다듬어진 시형, 섬세하고도 영롱한 정서가 어우러진 시를 씀으로써 우리 나라 순수 서정시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 마음 아실 이> <오~매 단풍 들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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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균(金玉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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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1894
- 조선 고종 때의 정치가로 호는 고균. 충남 공주 출생. 갑신정변의 중심 인물인 그는 일찍이 개화 사상에 눈을 돌려, 1881년에 일본으로 가서 선진 문물을 보고 귀국하였다. 그 후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더불어 독립당 을 조직,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켜 실권을 잡았으나, 청나라의 위안 스카이가 개입함으로써 3일 만에 실패하였다. 이후 일본에 망명, 10년 동안 떠돌다가 상하이로 갔으며, 이 때 홍종우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저서] <기화근사> <치도약론> <갑신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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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호(金容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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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973
- 시인으로 경남 마산 출생. 1930년 무렵에 시집 <향연>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한 이후 동인지(맥))를 통하여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후진 양성과 시문학 발전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1956년에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받았다.
[저서] 시집<해마다 피는 꽃> <남해찬가> <날개> <시문학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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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정(金裕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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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937
- 소설가로 강원도 춘천 출생. 연희 전문 학교(현재의 연세 대학교)문과를 중퇴한 후 ‘구인회’를 조직하여 순수 문예 운동을 폈다. 이후 토속적인 어휘의 구사와 표현, 전통적인 유머 등을 사용하여 서민들의 인간상을 깊이 있게 그린 많은 단편 소설을 발표하였다. 그는 30세의 젊은 나이로 아까운 인생을 마쳤는데, 불과 2년 동안에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 <소낙비> <노다지> <금 따는 콩밭> <봄 봄> <동백꽃> <땡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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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육(金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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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1658
- 조선 시대의 문신, 학자로 호는 잠곡. 소현 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갈 때 함께 갔다가 귀국, 효종 때에는 벼슬이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충청도 등에 대동법을 실시케 하였으며 400년 동안이나 써 오던 역법 대신에 1653년부터는 ‘시헌력’이라는 새 역법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저서] <잠곡필담> <구황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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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金允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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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1922
- 조선 말기의 학자로 호는 운양. 1884년에 전권 대사로서 러시아와 통상 조약을 맺어 거문도 사건을 마무리지었으며, 1894년에는 기홍집 내각의 외무 대신으로서 개혁 정치에 힘썼다. 1896년에 친러파 내각이 서자 제주도로 유형되었다가 풀렸고, 한.일 합방에 협력한 공 때문에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용직과 함께 조선 독립 청원서를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에게 제출함으로써 작위를 빼앗겼다.
[저서] <운양집> <음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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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생(金長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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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1531
-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으로 호는 사계. 송익필로부터 예학을, 이율곡으로 부터 성리학을 배운 그는 한 때 벼슬길에 올랐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여, 특히 예학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 그리고 서인을 중심 으로 한 기호 학파를 이룸으로써 조선 유학계에 있어서 영남 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저서] <경서변의> <근사록석의> <가례집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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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金正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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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1866
-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으로 호는 사계. 송익필로부터 예학을, 이율곡으로 부터 성리학을 배운 그는 한 때 벼슬길에 올랐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여, 특히 예학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 그리고 서인을 중심 으로 한 기호 학파를 이룸으로써 조선 유학계에 있어서 영남 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저서] <경서변의> <근사록석의> <가례집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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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희(金正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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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1856
- 조선 말기의 문신, 금석학자, 서예가로 호는 추사, 완당.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른 그는 예서, 행서의 명필로 유명한데 특히 ‘추사체’라는 독특한 글씨체를 이루어 후세 서예의 모범이 되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사실에 바탕을 둔 과학적 방법으로써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를 목표로 하였으며, 그는 또 금석학에도 밝아서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밝혀 내었다.
한편, 그림은 특히 산수화와 죽란에 뛰어났다.
[대표작] 그림<묵죽도> <묵란도>
[저서] <완당집> <실사구시설> <금석과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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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서(金宗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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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3~1453
-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호는 절재. 1433년(세종15)에 함길도 도관찰사로서 6진을 설치,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의 북쪽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그 후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왕의 자리에 오르자 좌의정이던 그는 단종을 잘 보살폈으나, 왕의 자리를 노리던 수양대군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고려사> <세종실록> <고려사절요> 등을 펴내는 데에 힘쓴
바 크다.
[저서] <제승방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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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섭(金晉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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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 독문학자, 수필가로 호는 청천. 경북 안동 출생. 일본 호세이 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한 후 도쿄에서 해외 문학 연구회를 조직하고 <해외문학>창간에 힘썼으며, 귀국 후에는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여 신극 운동을 폈다.
서양 수필의 영향을 받은 그는 “수필 속에는 생활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 우리 나라 수필 문학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6.25 전쟁 때 북으로 끌려 간 후 소식이 끊겼다.
[저서] 수필집<인생 예찬> <생활인의 철학> 논문집<교양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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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일(金千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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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7~1593
- 조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호는 건재.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등과 더불어 의병 수백 명을 이끌고 강화성에서 활약하였다. 그 후 진주성으로 내려가 성을 포위한 왜군과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아들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최후를 마쳤다.
[저서] <송천집> <건재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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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택(金天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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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영조 때의 가인으로 호는 남파. 같은 평민 출신인 김수장 등과 더불어 시인, 가인들의 모임인 경정산가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1728년(영조4)에 시가집인 <청구영언>을 펴내었는데, 이 책은 국문학사상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시조에도 능하여, 그의 시조 57수가 <해동가요>에 실려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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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수(金春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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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2004
- 시인으로 경남충무 출생. 8.15 광복 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47년에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내놓음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이후 계속하여 <늪> <기>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등의 시집을 내놓아 세련된 현대시의 참맛을 보여 주었다. 1958년에 한국 시인 협회상을 받았다.
[저서] <한국 현대시 형태론>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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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金弘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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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5 ~ ?
- 조선 시대의 서화가로 호는 단원, 단구. 한 때 벼슬을 하기도 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일생을 그림에만 열중하여, 조선 시대 화가 중 으뜸으로 꼽힌다.
특히 그의 풍속화는 익살과 풍자를 담은 서민적인 것으로서, 고담한 색채를 사용하는 남화 양식을 더해 신선한 조형미를 이루었다. 한편, 그가 그린 용수사의 <삼세여래 후불탱화>는 우리 나라 최초로 형체의 원근과 높낮이를 표현한 작품이며, 그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투견도>는 서양화의 음영을 최초로 사용한 우리 나라의 작품으로서 높이 평가된다.
[대표작] <소림명월도> <신선도병풍> <군선도> <무이귀도도> <선동취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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