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명응(徐命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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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6~1787
- 조선 시대의 학자, 문신으로 호는 보만재. 1755년에 서장관으로서 청나라에 갔다 온 후 동부승지, 대사헌, 이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예조참판, 충청도 수군절도사, 한성부판윤, 홍문관대제학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수어사.봉조하 가 되었다. 역학에 밝은 실학의 대가인 그는 1759(영조 35)에 세종, 세조 때 사용하던 악보를 수집하여 <대락전보> <대악후보>를 펴내었다.
[저서] <보만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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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구(徐有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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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1845
- 조선 시대의 문신, 농정가, 실학자로 호는 풍석. 1834년에 호남 순찰사로서 궁핍한 백성들을 보자 안타까이 여겨, 일본에 가는 통신사에게 부탁, 고구마 종자를 가져 오게 하여 이를 각 고을에서 재배토록 하였다. 그리고 <종저보>를 지어 그 재배법을 널리 퍼뜨렸으며, <농대> <경계책> 등을 써서 영농법의 개량을 왕에게 아뢰었다. 그 후 <임원경제십육지>를 썼는데, 이것은 주로 농업 경제에 관한 백과 사전식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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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주(徐廷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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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2000
- 탁월한 언어 감각과 전통 소재의 활발한 활용으로 대한민국 문학계(특히 현대시)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이라고 불리는 인물로 평가받지만 친일, 친독재 행위와 반인륜 범죄에 대한 미화 때문에 기회주의적 어용 문인의 행태를 보였다는 비판과 반인륜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친일 전력이 있는 문학가의 글은 교과서나 참고서에 되도록 싣지 않으나, 그의 글은 정말 잘 썼고 중요성이 높다 보니 여전히 때때로 실리며 모의고사에도 출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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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삼문(成三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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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1456
-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로 호는 매죽헌.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그는 한글 창제 때에 명나라의 학자 황찬을 13번이나 찾아가 음운을 물었다고 하며, 다시 명나라에 가서 음운 등을 연구,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후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등과 더불어 단종을 다시 왕으로 받들려다가 실패, 세조(수양대군)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저서] <성근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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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世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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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9~1450 / 재위 1418~1450
- 조선의 제4대 왕으로 태종의 셋째아들. 22세 때 왕의 자리에 오른 그는 정치, 외교,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큰 업적을 쌓아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1420년에 집현전을 마련하고, 1446년에는 훈민정음을 반포하였으며 1449년에는 스스로 <월인천강지곡>을 지은 후 정인지, 권제, 안지 등으로 하여금 <용비어천가>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친히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만들고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 등 각종 천문, 과학 기구를 제작케 하였다. 한편 박연에게 명하여 음악을 정리하게 함으로써 아악의 기초를 닦고, 또 악보도 만들게 하였다. 또한 6진을 개척하고 4군을 설치하였으며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으마, 후에 3포(제물포, 부산포, 염포)를 열어 무역의 길을 터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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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열(宋時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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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1689
-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로 호는 우암. 봉림 대군(효종)의 스승이던 그는 벼슬이 좌의정, 우의정에 이르렀으나 서인의 우두머리로서 치열한 당파 싸움에 시달리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청주 화양동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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